‘만남’을 생각하면 ‘헤어짐’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떠나간 사람들…, 죽음은 사라짐으로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라짐이 곧 행복했던 순간들, 아름다운 기억들마저 안고 사라지지는 못한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부재를 깨닫게 만들고 그와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첫 만남과 함께 떠올리게 한다. 조금씩, 조금씩 더 그윽해진 향기로.

이처럼 내게는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몇 사람과의 만남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 첫 번째가 미국 유학 당시 첫 학기 때 만난 빌 샘플(Bill Semple) 교수님과의 만남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교수님은 수업시작 전부터 강당을 가득 메운 수많은 학생들의 자리를 지나 내 자리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노트에 만년필로 차분히 써내려간 그날의 수업 내용을 내 책상 위에 놓고 강단으로 나가 수업을 진행하셨다. 나는 교수님께 ‘만일 가지고 계신 노트가 있다면 잠깐 빌린 후 복사하고 드려도 되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아직은 영어가 서툴러서 잘 알아듣지 못하니 노트를 보여주실 수 있냐고 했던 것이다. 이에 교수님은 매주 강의시간이면 가득히 써내려간 두 장의 강의 요약 노트를 가져다주신 후 강의를 시작하시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이 되었다. 이처럼 첫 만남 이후 교수님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쌓아가며 건축의 진정한 값어치와 설계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평생 존경하고 있는 밥 엇징어(Robert Utzinger)교수님과의 만남이다.

 

 그분과의 첫 만남, 그 기억은 어느 여름날 아침, 평화로운 햇살이 들어오는 그의 방에서부터였다.
 창밖으로는 파란 잔디 위로 스프링클러가 칙칙 소리를 내며 여유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휴일이나 명절이면 꼭 따로 집으로 불러 한국식 밥을 해주시고 친아버지처럼 대해주신 학과장님이셨다. 어려움을 토로하러 찾아간 내가 서툰 영어를 구사해도 늘 차분히 들어주시고, 이것저것 자상하게 얘기해주신 분이다.
뿐만 아니라 하루는 샘플 교수님의 겨울밤 눈 속의 어이없는 죽음도 알려 주셨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응시하시며 샘플 교수님이 그간 주변 사람들과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 만남들은 추억 속 한 장으로 차곡차곡 쌓여가며 앞으로 넘길 추억의 페이지 앞에 멈춰서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또한 그간의 만남 중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 계신다. 바로 부모님이다. 어릴 적 시골길을 걷다가 주고받은 대화는 문득 그들을 만나게 해준다. 엄마와 손잡고 가던 길을 멈추고 처음 보는 맑은 개울물, 그것에 매료되어 징검다리에 주저앉아 두 손을 담그며 느낀 상큼한 차가움. 그만큼 눈부시게 반짝이던 하늘빛 아래 서서 빨리 가자며 발걸음을 멈추고 독촉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에 사랑스러운 한 순간 한 순간이 새겨져있다.

 하루는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 없이 아버지와 단둘이 한방에서 자던 날이었다. 아버지의 숨소리와 내 숨소리가 번갈아가며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아 숨죽이던 날이었다. 아버지 냄새로 가득 차 있던 텅 빈 방의 어색함이 시간이 지나고 몸과 마음이 성장해서야 사랑스러운 만남으로 새겨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점점 더 연세를 드시고 노약해지면서 종종 죽음을 언급하실 때마다 이러한 만남은 계속 더해져만 간다. 만남은 헤어짐으로 다가오고 헤어짐은 또 지치지 않고 새로운, 그리고 깊은 만남으로 이어진다. 그 만남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나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게 해줬다. 깨달음과 사랑은 시간이 흘러 내가 지었던 많은 집들이 허물어지고 사라질 때에도 어느 산골에선가는 더욱 깊이 물들어 가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헤어짐보다 만남들이 더 많지 않나 싶다. 헤어짐은 한순간이지만 만남은 기억 속 시간을 통과하며 그 길이만큼 길게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애를 낳고 생활고에 짓눌려 발버둥쳤던 순간들까지도. 늘 함께할 것 같던 그와 함께 가을 낙엽을 태우던 짧은 우정의 시간마저도…. 긴장하고 어려웠던 때 나에게 내밀었던 선생님들의 따뜻한 손길과 꾸지람까지…, 문득 그리운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해준다. 그리고 그 만남들이 오늘 이 순간에도 새로운 만남이 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행복으로 깊이 쌓여진다.
만남의 순간에는 헤어짐을 생각하지 못하지만 얼마 후 헤어짐을 걱정하게 된다. 하지만 헤어짐은 그리운 만남을 생각나게 하고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아름다움을 들춰낸다. 헤어진 후의 만남은 더욱 마음속 깊이 새겨들게 하는 힘이 있다. 때문에 이 세상이 더욱 아름답고 오래살만한 가치가 생겨서 가끔이라도 그들과의 만남을 떠올리게 하는 일상들과 함께하며, 오래오래 살고 싶다.



*1957년 서울 출생. 美 몬태나 주립대학교 건축학 학사를 거쳐 하버드 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 전공. 독일 국립대학교(1995), 몬태나 주립대학교(1999~2005), 하버드 대학교(2006) 교수로 역임. 現 하와이 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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