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년 전 8월, 좋아하는 악기인 ‘알프혼’을 만드는 캠프 참석차 전남 장흥에 왔다가 그해 11월 장흥으로 아예 이사를 했다.

사람들은 귀농이라고 하지만, 지난 이십여 년간 늘 농촌을 돌아다녀 왔던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이주’였다. 그전에 나는 미국, 캐나다, 호주, 중국의 풀밭에 가서 현장의 풀 상태를 확인하고 한국 수입상들이나 축협, 사료 공장에 연결시켜주는 무역 일을 하다가, 마지막 3년간은 미국에서 제일 큰 건초수출회사인 ‘ACX Pacific Northwest, Inc’의 한국 대리인으로 일했었다. 그러다 문득 소를 직접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저곳 알아보던 중, 취미인 알프혼 만들기 캠프를 하게 된 장흥이 마침 전국에서 제일 큰 면적의 풀사료를 재배하고, 인구수보다 더 많은 소를 키우는 곳이라는 걸 알고는 ‘바로 이곳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일찍 등산을 시작한 내가 대한산악연맹 ‘에델바이스 산악회’에 입회한 건 1969년, 요들*을 시작한 건 1970년 가을이었다. 1980년에는 회장을 맡았고, 그해 3월에 신입회원으로 들어온 은경이를 처음 만났다. 부지런하고 싹싹한 데다 회원들과 등산이라도 함께 할라치면 배낭을 깔끔하게 싸서 메고 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자주 산에 같이 다니다 보니, 어느 날 은경이에게 “나 산에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가게 해주면 너하고 결혼해줄게”라고 말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1989년 봄, 아들 수빈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는 편지를 네팔에서 받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지막 히말라야 원정이 된 89년 봄 시즌을 마치고 돌아오니 남은 것은 등산으로 단련된 건강한 육신뿐이었다. 생전 처음 취직을 해서 결혼식 때도 안 입어본 양복도 입고 넥타이도 매고 전국으로 거래처를 찾아 돌아다녔다. 매달 고정적으로 9박 10일 국내 출장을 다니고, 수백 번의 해외 출장을 다녔다. 그 사이, 연년생 아들딸 수빈이와 수린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들처럼 자랐다.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도 나름 중심을 잘 잡고 살아주던 아이들이 각각 22살, 21살 되던 해 1월 1일, 저녁을 먹다가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앞으로도 내 집에서 같이 살 사람은 우리 부부가 늙으면 책임지고 부양을 해야 하고, 독립하는 사람은 자기 시간과 자기 수입과 자기 결정권을 온전히 스스로가 누릴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둘 다 주저 없이 독립을 선택했다.

 

나는 계속해서 “살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더라도 미리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고 모든 것이 정해지면 연락만 해주거라. 또 혹시나 살다가 힘들면 들어와라. 쫓아내는 것이 아닌 스스로 홀로서기를 해서 살아보는 것이고, 살다 보면 생각대로 잘 안될 때도 있는데, 그럴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될 거다. 우리는 가족이니까”라고 말해주었다.

백댄서가 꿈이었던 아들 수빈이는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지만, 큰 키로 인해 부상을 자주 당하는 바람에 댄서의 꿈을 접었다. 대신 패션모델 일을 하다가 서울에서 마케팅 관련 직장생활을 하며 10년째 독립생활을 하고 있다. 내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 딸 수린이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적성에 안 맞는다며 자퇴한 뒤 해외로 돌아다니다가 태국에서 스쿠버다이빙 강사를 하던 수린이는 호주로 거처를 옮겨야겠다며 비용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가더니, 거기서 신랑을 만나 지난해 결혼하고 딸을 낳아서 잘 살고 있다. 독립할 때 월세 보증금으로 빌려간 오백만 원도 해외에 나가기 전 갚고 나갔다. 결혼식에 단돈 만 원 한 장 보탤 것 없이 몸만 오라던 내 딸 수린이는 넉넉한 형편은 아니나 스스로 장만하고 채워가는 삶을 살아주고 있다.

은경이와는 요들 클럽에서 만나 결혼을 하고, 또 정통 무반주 스위스 요들 중창팀인 햇살소리 중창팀의 맴버로서 수많은 공연을 같이 다녔다.

이제 혼자서는 허전해서 제대로 된 알프혼 소리가 나오지를 않는다. 우리 부부는 이제 늘 소도 같이 키우고 요들도 같이하고 알프혼도 같이 분다. 따로 살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생활 방식을 공유하는, 그래서 내가 헛살았다는 생각이 안 들게 해주는 사람들, 그런 가족과 같이 사는 것이 행복이다. 나는 이런 가족이 있었기에 부자가 아니어도 구차하게 살지 않았고, 이웃과 나누며 즐겁게 살 수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바람같이 살아온 내 옆에서 말없이 지탱해준 은경이가 있기에 가능했던 삶이다.


*알프스 지방에서, 가성을 섞어 특이한 소리를 내어 부르는 민요나 그런 창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