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또 환자 편지예요.”

  지난주 간호사가 춘천에 사는 한 소녀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편지를 읽고 나는 무척 화가 났다. 춘천에 살고 있는 그 소녀는 턱이 너무 길어 유치원 때부터 당근, 오이, 바나나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에는 ‘스크림’이라고 놀림 받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참았단다. 중학교 때는 ‘말대가리’라며 손가락질받고 주먹질과 왕따를 당했다. 친구들이 책상에다가 긴 턱 그림과 함께 모욕적인 낙서를 크게 해놓아서 울면서 열심히 지웠다. 지나가면 아이들이 말 울음소리를 냈다.
 ‘어쩌면 어린아이들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참담한 마음이었다.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를 그녀는 이렇게 표현했다. “한동안은 내가 죽어서 다시 예쁘게 태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어요. 손목을 긋는 게 가장 쉬운 줄 알았어요. 그래서 툭하면 방문 잠그고 앉아서 조각칼로 손이랑 손등, 팔을 마구 그어댔어요.”
그래도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부모님께 생활비를 가져다 드린 그녀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간암 투병 중이었다.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녀는 편지에다 이렇게 적어왔다. “얼굴 때문에 슬퍼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꼭 제가 취업에 성공하여 가족이 지금보다 편한 미래를 살게 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빈털터리 딸이 되는 건 정말 큰 죄인 것 같아, 전 꼭 당당히 면접을 보고 성공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수술을 받게 된다면, 제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것이며 미래를 위해 더욱더 노력할 것입니다. 걸을 때도 고개 들고 당당히 걷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것입니다. 저와 같은 삶을 살았던 분들께 저 또한 아낌없이 도와주며 살아갈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큰 도움을 받은 것처럼요.
제가 만약 수술 자격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생님께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이런 봉사로 저 같은 아이에게 희망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편지로라도 선생님께 털어버리니 뭔가 홀가분한 것 같습니다. 존경합니다! 저도 꼭 커서 제가 받은 만큼 모두 베풀고 살아가겠습니다.”
 편지를 읽고 난 순간, 이 소녀는 ‘하늘에 계신 보스’께서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진단을 해보니 치아교정은 보스께서 미리 하셔서 할 필요가 없었고, 시뮬레이션 결과 연예인만큼 아름답게 변신할 수 있었다. ‘널 수술해서 너를 비웃던 친구들 코를 납작하게 해 줄게!’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 소녀는 이제 곧 수술을 앞두고 있다.
문득 예환 씨가 생각났다. 억울한 폭력으로 얼굴, 목, 몸통에 화상을 입어 아랫입술과 목이 붙어버렸고, 입을 다물 수 없었던 환자. 사회에서 따돌림받던 그 환자에게 팔에서 턱으로 피부를 이식하는 수술을 해드렸는데, 느닷없이 작년에 환한 웃음과 함께 흰 봉투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봉투 안에는 70만 원이 들어있었다. 놀라서 거절하는 내게 그녀는 “제가 간병인으로 취직해서 받은 첫 월급입니다. 선생님, 제발 다른 가난한 환자들 수술에 보태주십시오.” 하고는 홀연 가버렸다. 그녀는 결국 나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만 원의 수술’이 올해로써 백오십 명이 넘었다. 남들은 대단하다고 하지만 나는 단지 인연의 끈으로 나를 찾아온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을 뿐이다. 수술을 시작한 지 29년째…, 나는 나의 ‘보스’가 왜 나를 그토록 단련시키셨는지 알고 있다. 치과대학, 의과대학 합해서 10년, 독일에서 수련생활 7년, 그리고 의과대학 교수 3년, 개원해서 14년. 그동안 얼굴뼈 수술은 만 건이 훨씬 넘었고 그중 주걱턱 수술은 3,500명 정도 할 수 있었다. 정말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나는 ‘보스’께서 직접 수술하실 수 없으니까 나를 도구로 환자들을 돕게 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서 받을 칭찬은 거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항상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그 베풂은 복이 되어 너와 네 자녀에게 다시 돌아온단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며칠 전 혼자 산책을 하면서 한 가지 바람을 갖게 되었다. 언젠가 여기를 떠나 ‘나의 보스’ 앞에 섰을 때 이런 말씀을 듣고 싶다. “참 수고했다. 이제 여기서 나와 함께 편히 쉬어라.”


<약력>
서울대 치대, 조선대 의대, 독일 함부르크대학교대학원 의학박사. 독일 턱 얼굴 성형외과 전문의. 서울 아산병원 성형외과 조교수. 강남성모병원 턱 얼굴 외과클리닉 부교수. 現 한성익의원/ 턱 얼굴 성형 클리닉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