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은 배우의 내면적 투쟁과 예술적 노동이 집약된 무대예술이자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이 고된 작업의 빛은 현실의 벽에 굴절되면서도 끊임없이 대중의 관심과 무관심의 그 어디쯤에 머물면서 고전적 가치를 전하고 있다. 가장 새로운 어제, 서술된 시간과 공연된 시간의 모순은 연극의 물성이자 우리가 연극을 찾는 이유이다. 이러한 무대적 생명력이 ‘7시간’이라는 러닝타임으로 환원되어 관객들을 찾았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미완성작인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이 원작의 방대한 양과 묵직함 그대로 무대에 오른 것이다. 이는 연출과 배우, 관객들에게도 하나의 도전이었다. 작품의 백미는 도스토옙스키도 인정했듯, 제1부에 등장하는 이반의 서사시 ‘대심문관’(大審問官) 장면이다. 적막 속에서 한줄기 빛에 의지한 채 족히 원고지 30매 정도 분량의 대사를 30분 가까이 내뱉는 아흔 살 대심문관(추기경)의 독백은 배우 정동환(69)의 농익은 연기로 진해졌다. 스토리텔러인 도스토옙스키부터 대심문관, 조시마 장로, 식객까지 1인 4역을 맡은 그는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라며 이 극에 대한 외경심을 드러냈다. 연기 경력 52년의 그는 그렇게 마의 산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 봉우리를 찾아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그를 만나보았다.

Q. 이번 작품은 양적으로나 관통하는 주제면에서나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다
-사실 미지의 세계였다. 긴 대사가 몇 페이지 넘어가도 최소 한 페이지 이상은 내 머리 앞에 가 있고, 입은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 기운이 넘치던 시절에는 아무리 긴 독백도 일단 첫 자를 떼면 마지막 글자까지 한 번에 보일 정도로 머릿속에 대사가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온통 대심문관 생각밖에 없다. 아무것도 아닌 척 잘 굴러가는 척 할 뿐 온전히 잠을 잘 수도 없다. 심지어 다른 생각을 하면 죄짓는 기분까지 든다. 
 
Q. 인간과 신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다룬 작품이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대심문관’ 장면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신에 대한 문제는 인류의 주요 관심사이다. 때문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자적 입장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고백’을 연기해야 한다. 크리스천이나 무신론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과연 이 길을 잘 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만일 내가 배우로서 개인으로서 뭔가를 어필하려는 욕심을 갖는다면 문제가 커진다.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저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사명감을 지닌 사람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Q.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어떤 한계를 느끼는 시간이었겠다
-만일 행간의 단어 하나라도 틀리면 그 뒤가 완전히 달라져서 연결되지 않는다. 문어체에 가까운 말들을 구어체화 하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알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뭔가를 놓치고 다른 시도를 한다면 그 뒤는 모두 엉켜버린다. 다행히 리허설 1번, 공연 3번(인터뷰 시점에서) 하고 나니 이만큼 왔다 싶지만, 사실 앞길은 아무도 모른다. 무대 위는 누가 도와줄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나. 25분인지 30분인지 알 수 없는 그 독백이 그래서 두렵다.

Q. 배우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52년이다
-어쩌다 이쪽에 재능을 발견해서 지금까지 연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머리도 좋은 편이 아니라서 남들보다 더 많이 집중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늘 열 배 스무 배, 아니 그 이상 노력하지 않으면 극복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적어도 이런 일은 내 나이의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도 물론 잘 알고 있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연극 무대를 지켜왔다.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됐나
-연극은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다른 매체에 비해 힘들긴 하다.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하니까. 하지만 직접 만나야 한다는, 이 시간이 아니면 영원히 놓쳐 버린다는 것 때문에 매료되는 것 같다. 나에게는 연극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다. 인간을 깊이 들여다보고 성찰할 수 있는 작품들이 버텨줘야 한다. 이것으로 돈을 버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연극은 이런 내 신념과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Q. 그렇다면 이 작품은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어떤 성찰을 하게 했나
-내 안의 문제, 내가 나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 역시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게 진짜 문제였던 거다. 그래서 이런 귀한 기회들이 너무 감사하다. ‘이런 걸 어떻게 해’ 하고 포기했을 수도 있지만 하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또 하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편협해지고 쓸 데 없는 것에 신경을 쓰면서 잔말도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Q. 그동안 맡은 배역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사실 배역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좋은 배역, 나쁜 배역이 있는 게 아니라 좋은 배우, 나쁜 배우만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감사히도 좋은 작품과 배역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다만 아쉬움은 많다. 정신적으로 좀 더 고통을 감수하고 이겨냈다면 더 좋은 작품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Q. ‘아쉬움’이라고 하면, 배우로서 늘 어떤 것을 넘으려고 하는 사명감의 다른 표현인가
-내가 연기하는 인물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고민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이다. 더 깊이, 온전히 그 인물에 대해 알고 싶다. 늘 이 정도면 됐겠다, 턱을 넘어섰겠다 싶지만, 단 한 번도 넘어보지 못했다. 거의 근접했을 뿐. 지난 번 <메피스토> 때도 느꼈지만 분명 예사로 넘지 못할 벽이 있는 것 같다. 작은 배역이든 큰 배역이든 말이다.
 
Q. 좋은 배우가 갖춰야 할 덕목이 있다면
-무엇보다 자기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물론 연기는 ‘더불어’ 해야 한다. 상대가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진짜 잘 하는, 좋은 연기이다. 상대를 빛나게 해야 비로소 내가 빛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돋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작품에서처럼 인간은 잘못 창조된 반역자니까(웃음). 스타니슬랍스키가 ‘연기론’에서 말했듯,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

Q.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연극에서는 특히 극중 인물의 연배에 맞는 원로 배우를 찾기 힘들다. 예를 들어 리어왕을 할 수 있는 배우가 있을 때 리어왕을 해야 하고, 샤일록을 할 수 있을 때 베니스의 상인을 연기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나 역시 조금 더 힘을 내서 내 나이에 맞는 배역을 연기하고 싶다. 고여 있지 않고 늘 새로운 마음으로. 

# 내년이면 일흔이 되는 관록의 배우는 관객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배우들과 관객들 모두 시간의 흐름조차 인지하지 못한, 편안한 마음의 상태라면 충분히 소통되고 있다는 얘기니까.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7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글. 사진/ 김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