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 _ 심청, 발레 인생의 새로운 챕터 _ 한상이 발레리나

나와 발레와의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동네에 있는 발레학원을 다니면서 처음 발레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 발레는 내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사실 나는 다소 늦게 발레를 시작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도 또래의 발레 지망생들이 희망했던 예원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발레를 배우면서 나는 그 누구보다 연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열정을 쏟고 노력을 기울였다. 전임 선생님이 나의 장점을 가늘고 연약한 몸 선이라고 하면서 수업 시간에 종종 나를 모델로 내세우시기도 하는 등 나는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는 행운아였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감사한 순간들이다. 그때부터 발레는 내 삶의 기쁨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노력한 만큼 성과를 거두고 주위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춤추는 순간, 그 몰입의 시간만큼은 너무나도 행복하기만 했다.

어느덧 예원학교를 졸업한 나는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2학년을 마치고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 입학했다. 그러고 나서 로잔 국제발레콩쿠르, 뉴욕 YAGP 콩쿠르 입상을 계기로 한국예술종합학교 2학년을 수료하고 열여덟 살 어린 나이에 모나코 댄스 포럼에 참가해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발레단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3년간 활동한 뒤에는 클래식 발레와 모던 발레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는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적을 옮겨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해외에서의 발레 여정은 계속되었다.

꿈꿔왔던 해외 발레단 생활. 이를 기반으로 한 수많은 투어 공연으로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접하며 알게 되었고, 발레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언어와 음식, 그리고 문화 등 다른 점이 많아서 생각하지도 못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당시에는 그토록 힘들었던 일들조차 나 자신을 한층 더 성장하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자양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무용수에게는 화려한 무대 뒤 부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나 역시 잦은 부상으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던 위태로운 그 순간들을 견뎌내면서 몸도 마음도 나무의 나이테처럼 더욱 단단해져만 갔다. 돌이켜 보니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힘든 일도, 모두 내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루하루 고군분투했던 6년간의 시간, 그 치열했던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2010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하기 위해 귀국했다. 새로 입단한 유니버설발레단의 레퍼토리로는 다양한 클래식 발레와 해외 유명 안무가 ‘지리 킬리안(Jiri Kylian)’, ‘나초 두아토(Nacho Duato)’, ‘한스 반 마넨(Hans van Manen)’ 등의 모던 발레를 비롯해 <심청><춘향> 등 한국 고전을 토대로 만든 창작 발레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 중에서 단연코 나의 관심 작품은 <심청>이었다. <심청>은 국내뿐만 아니라 수많은 해외 공연을 올리면서 현지에서도 극찬을 받은 창작 발레이다. 한국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무대 세트와 의상 등 한국의 전통 의상을 장착했지만 철저히 클래식 발레 동작을 기반으로 동·서양 미(美)의 조화를 보여주는 유일무이한 수작이다.

어린 시절부터 문훈숙 단장님의 <심청>에 매료됐던 나는, 입단 후 <심청> 속의 여러 역할을 하면서 늘 심청이가 되는 꿈을 키워왔다. <심청>은 한국의 아름다운 정서 ‘효(孝)’를 주제로 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춤, 연기, 음악, 모든 요소가 아름답고 섬세하게 표현되어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2016년 처음으로 ‘심청’을 맡았을 때의 설레는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단장님의 열정적인 지도를 바탕으로 매일매일 혼신의 힘을 다해 심청으로 환생한 것처럼 몰입하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나는 무대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연습 기간 내내 마치 달콤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첫 데뷔 무대이다 보니 주변에서 마음을 써 주셨는데, 특히 옆에서 많은 가르침과 팁을 준 수석 무용수 황혜민 언니, 파트너 재용 오빠의 큰 도움과 격려 덕분에 문제없이 공연에 임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리지만 강단 있고 강인한 심청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새삼 부모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발레리나 한상이’가 있기까지, 오랜 세월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 주고 보듬어 주신 나의 부모님. 부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장 지근거리에서 나를 지켜보며 한없이 마음이 타들어 갔을 부모님…. 부디 이 공연이 두 분께 자그마한 위로가 되었기를 바란다. 값지고 귀한 시간이었던 2016년 이후 2023년에는 <심청> 포스터의 주인공이 되어 다시 한번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 모든 만남의 순간은 내 발레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의 새로운 챕터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공연이 되어 마음 한구석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예원학교, 서울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를 거쳐 모나코 왕립발레단(2005~2007), 네덜란드 국립발레단(2007~2010)에서 활동. 스위스 로잔 발레콩쿠르 파이널리스트(2002), 미국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콩쿠르 3위(2004), 서울국제무용콩쿠르 동상(2004), 한국발레협회 프리마 발레리나상(2017), 現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