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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발자국

첫 흰머리

최서영, 영상 크리에이터·前 아나운서

어린아이가 우는 이유는 수백 가지겠지만, 어른이 우는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삶이 너무 무거워서.

처음 흰머리를 발견했을 때의 감정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세월을 흘려보냈다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이었다.

얼마 전 우연히 <셸 위 댄스(Shall We Dance)>라는 영화를 봤다. 중학교 특활 시간에 한 번 봤던 영화인데, 그때는 그저 사교댄스라는 낡은 장르를 재발견하는 내용으로 여겼던 영화였다. 넷플릭스를 뒤지다가 90년대 일본의 레트로한 느낌이 요즘 다시 유행이니까 한번 볼까 하고 고른 영화였다.

영화 초반 주인공인 중년의 남자는, 아니 남자라기보다 ‘아저씨’다. 그는 오랫동안 한 회사에 다니며 이제 막 내 집을 마련했다. 밝고 알뜰살뜰한 아내와 따뜻한 딸과 함께 평범하고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어쩐지 텅 비어있다.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 그의 모습은, 화면 밝기도 줄이고 배터리를 많이 먹는 앱은 꺼버린 딱 꺼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방전 직전의 스마트폰 같다. 정답이라고 믿고 너무 많이 와버린 평범한 어른의 삶이 얼마나 외롭고도 무거운 것인지가 그려진다.

그는 애써 창가에 비친 자기 모습을 외면한다. 나는 변함없이 나인데, 어느새 몰라보게 나이들어버린 자기 자신이 너무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하염없이 밖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본 것이 바로 댄스 교습소였다. 그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춤의 세계로 일탈을 시작한다. 어쩌면 그곳에 빨리 감기처럼 지나가 버린 자신의 청춘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하며.

스물 몇 살 때부터 나는 항상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언제쯤이면 이 무거운 삶이 가벼워질 수 있을까.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괜찮아질 때는 언제일까를 생각하면 울고 싶어질 때가 많았다. 버거운 날들을 얼른 겪어버리고 모든 것이 편안해진 할머니로 살고 싶었다. 노인에게 세상이 큰 기대를 걸지 않듯이 사람들이 나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임과 평가에서 자유롭고 싶었고, 그러지 못해 늘 힘든 날들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 내가 유일하게 가진 건 젊음이었지만, 그 젊음은 너무나 눈이 부시고 싱그러워서 내가 가지기에는 벅차기만 했다. 세상이 젊은 나에게 바라는 것을 얼른 해치워내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거칠 것 없는 나의 자유로운 인생이 펼쳐지리라 믿었다. 조급하게 마감 기한에 맞춰 인생의 숙제를 쳐내느라 주먹을 꽉 쥐고 살았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변두리에 집을 사고…. 삼십 대 후반, 모든 걸 해치웠다는 후련함도 잠시, 누군가는 유예하고 있는 뻔한 어른의 삶을 나는 선택하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서둘러 나이들고 싶었던 내가 이제는 뻔해져버린 내 삶이 두렵기 시작했다.

매일 보는 화장대의 거울은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진실은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차창에 있었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보았던 지친 얼굴, 그 낯선 어른 여자의 얼굴을 처음 마주한 날 나는 정말로 내 인생이 돌이킬 수 없는 어느 지점에 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얼굴이 <셸 위 댄스>의 남자주인공과 다른 얼굴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날의 나는 방전 직전의 스마트폰 같았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렇게 버겁고 무거웠던 젊음이 마구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것,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무언가를 길에서 잃어버린 것처럼 황망한 마음이 드는 것. 저만치 멀어져간 날들을 후회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되는 일이 정말이지 하나도 없을 때 주저앉아 엉엉 울 수 있는 날들을 그리워하는 것.

고작 삼십 몇 년 묵은 내 삶을 껴안고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을 뒤졌다. 생각지도 못한 흰머리가 군데군데 숨어있었다. 마치 못 볼 걸 본 것처럼 허겁지겁 내 머리에서 흔적을 지워버리려 노력했다. 족집게로 흰머리를 뽑아낸다고 무겁게 살았던 젊은 날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왠지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