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의 그림카페

나를 위해 그리다

이근희, 일러스트레이터

작년 겨울,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꽤 강도 높은 수준의 외주 작업이 계속되었다. 나는 좀 더 탄탄한 경력이 필요했고, 아이들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라도 오롯이 그 시간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온종일 디지털 작업에만 정신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 아이들에게는 방임을, 내 건강에는 적신호가 들어오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밀도 높은 일상은 계속되었고, 눈의 실핏줄이 터지고 얼굴에 황달이 왔을 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작업이 마무리될 무렵, 결국 번 아웃이 찾아왔다. 나는 집안일도 아이들 케어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그냥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말 그대로 하얗게 불태워 더 이상 태울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나는 남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 나는 내 그림에 페르소나를 활용해 보기로 했다.

뒤돌아보니 나는 유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빨간 머리 앤>을 좋아했다. 책을 정독해서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동화책에서 보이는 그녀의 성격과 코스프레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로 갔지만, 그렇다고 그녀는 평범한 소녀는 아니었다. 아마 뼛속까지 전형적인 서양인이었던 그녀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굉장히 특이하고 맹랑한 소녀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막힘이 없는 그녀의 성격은 꽤 매력적이다. 앨리스가 갑자기 현실 세계로 돌아왔을 때 허탈감이 느껴지는 것처럼 지금의 내가 그림 속의 그 소녀들처럼 자연에서 유유자적하고 고양이들과 여유를 즐기고 있는 현실적 자아가 아니라는 점이 슬프도록 비슷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은 앨리스보다는 빨간 머리 앤에 더 가깝다. 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방적인 비극들을 자신이 선택한 방향으로 꿋꿋이 이끌고 나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서 애틋한 행복을 느낀다. 내가 소녀 시절에 겪었던 말할 수 없는 비극과 우울감, 아마도 이런 접점의 이유로 나는 그녀들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내 그림에서 그녀들은 주로 뒷모습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혹시라도 그녀들의 얼굴이 발각되는 순간, 왠지 투영에 대한 자기 최면이 무참히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저 뒷모습은 자기 자신이나 연인, 또는 딸이 되어 주기도 한다. 아이에서 어른까지 각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녀들은 서로 다른 삶의 매개체가 되어 무한한 상상을 하게 만들어 준다. 물론 이런 흥미로운 상상이 누군가에게는 오글거리는 감성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즐거움이고 행복 그 자체이다.

글을 닫으며 <빨간 머리 앤>의 명대사가 생각난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해요.”

나 역시 나의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휴식과 작은 울림이라도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영향력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도 그 영향력을 위해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거침없는 앨리스처럼.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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