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人터뷰-뮤지컬 배우 윤공주]시간에 대한 믿음으로 / 김신영, 월간에세이 기자

무대 위 암전, 그 정지된 시간의 매듭이 풀리고 막이 오른다. 거대한 무대메커니즘에 의해 사물들이 재배치되고 서사의 창이 열리면 적막을 걷어내듯 한 여인의 노래가 들려온다. 짙은 갈색의 그을린 피부, 칠흑 같은 머리카락, 가녀린 듯 다부진 몸짓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그녀는 뮤지컬 <아이다>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인물인 ‘아이다’로 살고 있는 배우 윤공주(36)이다. 한국뮤지컬 대상 인기스타상 2회 수상에 빛나는 그녀는 <사랑은 비를 타고><맨 오브 라만차>
< 몬테크리스토><노트르담 드 파리><아리랑> 등 수많은 작품에서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그렇게 삶의 외연과 내연이 확장되면서 ‘여유’와 ‘긍정’이라는 단어는 일상의 테두리에서 중심으로 들어왔다.
단단한 언어의 집, 그 겹겹의 의미를 찾기 위해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보았다. 16년간 무대를 지키며 쌓아온 삶의 지층은 생각보다 더 견고했고,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더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아졌어요. 돌이켜보면 20대 때가 더 불안했고, 오히려 지금이 가장 많은 작품을 할 수 있는 나이인 것 같아요. 물론 3~4년 후에는 배역도 줄고 제한도 있겠지만 그냥 오늘을 즐기려고요. 어차피 배우는 오디션의 연속이잖아요. 적어도 지금까지 해왔더니 여기까지 왔다는, 그래서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간절함 하나로 앞만 보고 달렸던 20대, 그 시절 휘몰아치던 불안감이 길들여지고 겉돌던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이 기적처럼 변했다고 한다. 어느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 누군가와 어떤 대화를 나누든, 무대 위에서 어떤 연기를 하든, 그 모든 순간이 기적이고 행운이란다. 이는 감사함의 다른 표현이자 긍정성의 원류가 아닐까.
“수없이 오디션에 떨어지면서 좌절도 많이 했죠. 그런데 막상 그 과정을 겪고 보니 오랫동안 할 수 있겠더라고요. 저는 제 부족한 점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이를 보완하고 채워가야 발전하죠. 제자리 걸음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앞으로 나아가고 있더라고요. 늘 최고를 위해 최선을 다해도 완벽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늘 아쉽고, 다음 공연이 기다려져요(웃음).”

#희망, 그리고 지금

엘튼 존과 팀 라이스, 팝과 뮤지컬 거장들이 빚어낸 <아이다>는 동시대성을 확보하며 작품성(토니상 수상)과 흥행성에서 모두 성공한 대작으로, 그 명성은 한국에까지 이어졌다. 여성을 타이틀 롤로 내세운 작품이 현저히 적은 뮤지컬시장에서 <아이다>는 ‘여배우라면 꼭 해보고 싶은’ 작품임에 분명하다. 그녀 역시 10년의 노력 끝에 ‘아이다’와 연이 닿았다.
“계속 오디션에 떨어지다가 이번에는 암네리스가 아닌 아이다로 도전했어요. <아리랑>을 보신 주변 분들이 아이다가 정서적으로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제 안에 어떤 한이 있나 봐요(웃음). 늘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는 작품에 끌리는데, <아이다>는 앙상블, 안무, 음악, 무대는 물론이고, 특히 ‘아이다’라는 인물에 공감이 갔어요. 모든 건 다 때가 있나 봐요. 연륜이 쌓이고 연기해보니 리더로서의 모습과 깊이가 더 섬세히 표현되더라고요. 정말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놓치면 안 되는 평생의 버킷리스트인 것 같아요(웃음).”
2시간 40분, 그녀가 ‘윤공주’에서 온전히 누비아의 공주 ‘아이다’가 되는 시간이다. 러닝타임 동안 배우와 스텝들은 최고의 장면을 위해 몰입하고 관계의 미학을 보여준다. 몰입은 공감으로, 공감은 감동으로, 다시 관객과 배우 간의 두터운 신뢰로 완성된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요즘, 공연을 준비하거나 무대에 오르는 매순간이 마냥 행복하고, 지칠 틈이 없다고 한다. 첫 대사의 짜릿함도, 첫 소절의 질감도, 첫 공연의 떨림까지도 감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늘 처음이 어렵죠. 하지만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집중하면 큰 실수는 없어요. ‘시간이 금이다’는 말을 새기며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해요. 그리고 <아이다>를 공연하면서 새삼 리더에 대한 생각을 하게 돼요. 촛불집회가 있던 날, 나는 여기서 대신 희망을 외친다는 마음으로 공연에 임해지더라고요. 모든 건 희망을 따라 나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그녀는 무대의 무게를 견뎌오면서 나와 타인에 대한 책임감과 시간에 대한 믿음이 강해졌다고 한다. 좋은 배우이기 이전에 ‘좋은 사람’이, 자신이 머문 자리에서 ‘어울릴만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은 그 어떤 화려한 무대보다도 뜨겁다. 버릴수록 더 많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실을 다져온 그녀가 꿈꾸는 배우에서 ‘꿈이 되는 배우’가 된 까닭이다.
“후배들에게 늘 말해요. ‘나도 했으면 다 할 수 있어. 노력은 늘 정직한데, 어쩌면 네 노력이 부족해서 아직 이루지 못했을 거야’ 라고요. 처음에 저도 그랬죠. 노래, 춤, 연기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었는데, 계속 노력하다
보니 늘더라고요.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보려는 시야도 생겼고요. 앞으로도 무대 위·아래에서 채워갈 게 너무 많아요(웃음).”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예쁘게 자라라고 부모님이 지어주셨다는
‘공주’라는 이름. 어쩐지 온실 속 화초처럼 보이지만 지금껏 걸어온 길에는 수풀과 나목들로 무성했다고 한다. 앞으로 보여줄 게 더 많다는 그녀는 오늘도 노래 한 소절, 춤 한 동작, 표정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어느덧 80을 넘긴 아버지를 호강시켜 드리려고 막연히 선택한 배우라는 직업도, 그녀와 닮아 보이는 누비아의 공주 아이다도 어쩌면 운명이 던져준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그 곁에 머물고 있는 그녀는 10년 전부터 매일 일기를 쓰며 감정의 결을 다듬고 있다. 개인적으로든 배우로서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픈 소망은 날카로운 펜촉에 실린다.
‘인생만큼 쉽다’(Easy as Life). 그녀가 꼽은 <아이다>의 넘버이다. 마치 그녀의 무대인생과 내면을 비추는 듯한 이 역설의 언어가 짙게 물들어간다. 삶에 대한 긍정, 자기 확신과 함께.